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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극락암 조사각 옆에 있던, 예전의 내 방 창가의 오동나무를 참 좋아했었다. 요즘같이 맑은 가을날 노사의 문집을 정리하다 문득 봉황이 깃드는 오엽(梧葉)을 생각하면 지긋지긋한 사바세계에서 찌들리다가 한 번쯤 크게 소리치며 극락으로 날아오를 봉황새의 날개짓은 그대로 나에게는 이상향이었던 게지. 1990년대초에 써둔 나의 일기장을 잠시 보면,
“몇 해 전인가 지금 이맘 때쯤의 가을이었습니다. 운수(雲水)로 겨웁도록 돌아다니다가 노장님의 문집(文集) 정리하느라고 얼마를 방 안에서 보낸 일이 있었습니다. 방 앞에 오동나무, 이건 너무너무 화려한 환상(幻想)이었습니다. 빈야프스키의 전설(傳說), 그 보헤미안 곡이 짙은 누룩이였구요. 한 번 구해서 들어 보셔요. 그리구요. 오엽(梧葉) 이거 눈여겨 보세요. 그 귀공자나무…참 좋아할 수 있는 나무예요. 그저 스치는 정도 말구요. 몇 달을 오엽의 환상 속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詩)라고까지는 할 수 없고 오엽의 송(頌)을 적어 보았는데 잘 되질 않는군요.
창가에 오엽(梧葉)이 있다는 건/ 너무나 화려한 환상(幻想)/ 눈 앞에 서늘한 빛이 흐른다는 건/ 생명(生命)의 선량(禪糧)/ 가을을, 꿈을 잉태한 채/ 드높게, 지리하도록 맑은 바람을 마주하고/ 梧葉의 꿈/ 봉황의 깃이/ 순간마다 헤메이며/ 너무나도 풍요로운 햇살들이/ 파란 대밭 가의 너무나 풍요로운 햇살들이/ 청량한 가을의 몸짓으로 유희(遊戱)하다.(1982. 9. 23)
아마 자주 극락을 찾던 거사님께 보낸 편지글일 게다. 일생을 좌복 위에서 보내는 우리 수좌들은 항상 봉황의 날개짓을 생각하는 게 아닌가 하는 망상을 가끔씩 했던 거지. 수좌에게 중생이 부처되는 그거 말고 또 무슨 봉황의 날개짓이 있겠어. 가을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 가지 더 소개할 게 있다. 아마도 어떤 우바이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분을 소개해 보자.
“가을 냄새가 짙게 울려오고 있소. 서서히 다가오는 나그네의 계절/ 나그네와 가을 여인(女人)과 코스머스와 노오란 꽃술의 해바라기 미소가…/ 이 환상의 계절 몽환적(夢幻的) 사고(思考)를 담은 가을 하늘, 어느 누구의/ 가슴이든 안주(安住)에서 놔두질 않고. 방황 무수한 계절병/ 환자들을 치유도 보유한 채 밀려드는 홍화(紅花)의 잎사귀들은/ 어떤 상념(想念)의 조락(凋落)입니까? 언제고 서성거림을 짓게 하는 코스모스의/ 애릿한 향내음, 해바라기 보헤미안의 어수선한 계절 / 고귀한 사유(思惟)의 순간들은 방랑(放浪)을 통해서 즐거워지는 것인데/ 이 방황의 계절 가을은 짙은 아름다움에 취하게 하는 누룩이려오./ 휘부옇게 흔들리는 찬 빛깔의 월광(月光)도/ 하늘도 산도 모든 빛깔들도 수척해진 가을 냄새를 흩고 있고,/ 어느 해 가을엔가 늙은 처사와 마른 감나무 잎새를 모아 놓고 앉아서/ 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赤壁賦)를 목놓아 부른 적이 있소.…(1989. 10)
가끔은 가을의 짙은 향기에 젖어 보낸 적이 있다. 시세(時世) 말로 가을을 탄 것일까. 어찌 보면 가을 향기에 취해 봉황의 날개짓을 떠올리며, 오후내내 금강산(金剛山) 마하연(摩訶衍) 선원에서 정진하는 낮꿈을 꾼 것인지도 모른다. 내일은 김밥 넉넉히 챙겨서 영축산 정상에 한 번 올라봐야겠다.
통도사 극락호국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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