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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받아 보니, 어려서부터 벼슬에 이르기까지 큰 스승을 찾아 공부하다가 중간에 직장을 가지고 결혼했기 때문에 공부를 하지 못하게 된 것을 큰 죄로 삼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살이가 무상하고 덧없어서 무엇 하나 즐거워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오직 한마음으로 생사(生死)의 일을 구명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하니 참으로 반갑습니다.
그러나 이미 직장인이 되었으니 녹을 먹고 살아갈 것입니다. 결혼하고 사회인이 되는 것은 세상살이를 하는 사람으로서는 누구도 면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니 결코 이렇게 된 것은 공(公)의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작은 죄를 크게 두려워하니 이는 전생에 훌륭한 선지식을 만나 지혜의 종자를 심은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공께서 말하는 ‘큰 죄’라는 것은 공자와 같은 성현도 결혼하고 벼슬살이 하는 등 면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다만 세상살이가 무상하고 참다운 것이 아닌 줄 알고 불법(佛法)에 마음을 돌려 지혜의 물로써 더러운 때를 씻어 없애십시오. 청정한 마음으로 살아가면서 한 칼에 번뇌의 마음을 잘라내어 앞생각과 뒷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하십시오.
이미 모든 것이 헛된 것임을 알면 스스로 지어 만드는 것도 헛된 것이요, 받는 것도 헛된 것이요, 깨달았다는 것도 또한 헛된 것이며, 거꾸러졌을 때도 헛된 것이니 과거ㆍ현재ㆍ미래가 모두 헛된 것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오늘 잘못된 일이 있으면 환약(幻藥)으로 환병(幻病)을 치료해야 할 것이며, 병이 치료되고 약이 필요 없으면 다시 병이 생기기 전의 사람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만일 따로 치료할 사람이나 법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큰 잘못입니다.
공은 이런 이치를 깊이 생각하여 이미 지난 일은 두려워하지도 말고 또한 생각하지도 마십시오. 생각하고 두려워하면 곧 도에 장애가 됩니다. 다만 모든 부처님들 앞에 큰 서원을 세우되 “원하건대, 이 마음이 견고하여 물러나지 않게 하시고 모든 부처님들의 보살핌으로 훌륭한 스승을 만나 말 한마디에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 모든 부처님들의 은혜를 갚게 해주십시오.” 하십시오. 만일 이런 서원을 세워 노력하면 깨닫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화엄경》에 나오는 선재동자(善財童子)를 보지 못했습니까? 선재동자는 문수보살(文殊菩薩)에게서 발심한 뒤 점차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53명의 선지식을 차례로 뵙고 최후에 보현보살(普賢菩薩)의 십대원(十大願)을 듣고는 서방정토(西方淨土)에 왕생하여 법계(法界)에 들어갈 수 있도록 원을 세우고 이를 성취한 것입니다. 이에 문수보살이 선재동자의 구도 정신을 칭찬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착하도다. 선남자여! 만일 신근(信根)이 없었더라면 세간을 여의고 법계에 들어가는 해탈을 얻지 못했으리라.”
과거ㆍ현재ㆍ미래의 모든 불보살이 위없는 깨달음을 얻은 것은 과거에도 물러남이 없었고 현재에도 물러남이 없고 미래에도 물러남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성취하였는데 이는 다 믿음이 지극한 까닭입니다.
공은 이미 세속에서도 참선을 한다 하니 선재동자의 믿음과 다름이 없고 또 나에게 편지를 띄울 때 성현들에게 예배한 다음 보냈다 하니 정성이 매우 지극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공부를 한다면 위없는 지혜를 원만히 성취할 것이 분명합니다.
방거사(龐居士)가 말하기를 “모든 것이 공(空)하니 참다운 것이라 여기지 말라.” 하였으니 이 뜻만 알면 일생 동안 참선하는 일을 마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머리만 깎았지 불교를 모르는 사람이 있어서 자기 눈도 밝히지 못하고서 남에게 “쉬어라, 쉬어라!” 하는 소리만 합니다. 만일 죽은 고양이같이 쉬기만 한다면 천불(千佛)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더욱 마음만 답답하게 될 것입니다.
운문(雲門) 선사는 평소 이런 무리들은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운문 선사는 고요한 곳을 향하여 좌선하라고 권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병에 따라 약을 주듯이 방편에 의한 것일 뿐입니다.
황벽(黃蘗) 선사의 말을 듣지 못했습니까? “우리 선종(禪宗)은 위로부터 서로 이어 오므로 사람들에게 지해(知解)를 구하지 않게 하고 단지 도를 배우게 한다.” 하였으니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도라는 것도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도를 배우려는 마음이 있다면 이는 벌써 미혹에 빠지고 맙니다. 도는 처소가 없기 때문에 대승심(大乘心)이라 합니다. 이 마음이 안과 밖, 중간에도 있지 않으니 진실로 처소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그대가 마음을 헤아리는 것으로 도를 삼는다고 하니 만약 헤아리는 그 마음이 다하면 곧 처소가 없어질 것입니다. 이 도는 원래 천진(天眞)하여 이름이 없는 것인데 단지 사람들이 알지 못하여 마음 가운데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들이 “네가 알지 못할까 두려워서 방편으로 도라는 이름을 세운 것이니, 이름에 집착하여 알려고 하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쉬어라, 쉬어라.” 한 것은 생각을 잊고 고요한 것을 지키는 것으로 공부를 삼으라는 뜻인데, 쉬어서 감각이 없고 지각이 없는 곳에 이르게 되면 흙이나 나무나 돌과 같이 될 것입니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이러한 말에 전혀 신경을 쓰지 마십시오. 단지 마음을 한곳에 두면 얻지 못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공(公)은 이미 청정하게 살아가는 가운데 도를 향하는 마음이 진실하고 견고하니, 공부가 잘되고 못되는 것에 상관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조사(祖師)들의 언행(言行) 위에서 탑을 쌓듯이 한 층을 쌓고 또 한 층을 쌓듯이 공부를 한다면 깨달을 날을 기약할 수 없습니다.
운문 스님에게 누가 물었습니다.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았다면 이는 허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운문 스님이 대답했습니다.
“수미산(須彌山)이다.”
또 물었습니다.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운문 스님이 대답했습니다.
“놓아 버려라.”
이것이 무슨 뜻인지 의심이 생기거든 단지 의심 속에 묻혀 공부할지언정, 이 의심을 말이나 생각으로 풀려고 하지 마십시오. 내 말을 믿어 운문의 경지를 얻게 된다면 사람들에게 따로 불법을 가르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도 내 말대로 하라고 가르치십시오. 만약 운문의 경지를 깨닫지 못하거든 여러 스승에게 물어서 한 여우의 의심을 마치고 한 여우의 의심을 하든지 마음대로 하십시오.
편지를 보니 “밖으로 모든 반연(攀緣)을 쉬고 안으로 마음에 헐떡거림이 없어야 도에 들어간다 했는데 이것도 방편의 문입니다. 방편의 문을 빌려서 도에 들어가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그 방편을 버리지 않고 지킨다면 병이 됩니다.” 하였으니 진실로 옳습니다.
산승(山僧)은 이 글을 읽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먹통 같은 무리들은 방편이 참된 법인 줄 알고 이로써 사람을 가르치려 하니 남을 잘못되게 인도하는 자가 적지 않습니다. 근세(近世)에 사악한 법은 강해지고 불법은 약해져서 심법(心法)으로 최상의 문을 삼는 자는 드물고, 방편을 지켜서 스승으로 삼는 자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공이 마음을 반야 가운데 두되, 생각 생각에 끊어지지 않는다면 위로 모든 성인의 여러 가지 방편을 훤히 알게 될 것입니다. 공은 이미 생사 문제를 손안에 쥐고 있는 듯하니 도에 들지 못할까 하는 걱정은 없습니다. 단지 경(經)을 보거나 조사들의 어록을 보거나 또는 화두를 들 때에도 마음이 반야 가운데 머물러 떠나지 않도록 하십시오. 따로 도를 구한다든지 다른 재주를 부리지 마십시오. 공이 세상의 티끌 속에 산다 해도 이와 같이 공부를 한다면 반드시 도를 성취할 것이며, 만약 이렇게 공부를 하는데도 도를 성취할 수 없다면 이는 불법이 영험이 없다 할 것입니다.
편지에 “꿈에 향을 사루고 산승의 집에 들어와 얼굴을 뵈었다.” 하였는데 꿈에 들어오지 말고 진짜로 집에 들어올 줄 알아야 합니다.
지혜제일(智慧第一)인 사리불(舍利弗)이 수보리(須菩提)에게 물었습니다.
“꿈에서 육바라밀을 행했다 하였는데 꿈을 깨고 나서도 같습니까, 다릅니까?”
수보리가 말했습니다.
“이 뜻은 심히 깊어서 나를 말하지 못하겠소. 이 모임에 미륵대사가 있으니 그대는 가서 물어 보시오.”
이런 대답은 허물이 적지 않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운문 스님에게 “증시랑이 지난 밤 꿈에 운문의 집에 들어갔다 하는데 꿈에 들어간 것이 꿈을 깨었을 때도 마찬가집니까, 다릅니까?” 한다면 운문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 집에 들어온 자는 누구이고, 들어오지 않는 자는 누구냐? 누가 꿈을 이야기한 사람이냐?” 그러나 이 말 또한 허물이 적지 않습니다.
대혜종고(大慧宗杲) : 중국 송나라 때 임제종의 고승. 17세에 출가하여 여러 스님을 모신 뒤 환오(圜悟) 스님의 법을 이었다. 저서에『광록(廣錄)』80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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